phenomenon

이종석의 근작, 우주 세한도(歲寒圖)

황록주(미술평론가, 경기문화재단 학예연구사)


부수고 헐어내면 하룻밤 새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도시 풍경의 변천사를 태어난 후부터 수십 년째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첫 번째 세대의 인류로서, 이종석 작가는 이미 전작들을 통해 나무가 있는 풍경이라는 오래된 관념의 자연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손길로 도시화된 자연, 혹은 도시라는 자연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넓고 평평한 자리를 집 한 채만큼 깔고 앉거나 저들끼리 가지를 부딪혀가며 몸을 세울 공간을 다투는 그런 자연의 나무가 아니라 꺾이고 치이고 잘리면서 어느새 풍경의 한 축을 이뤄낸 도시의 나무와, 푸른 벌판과 하늘을 삶의 터전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자연’이 된 도시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었던 그가 오랜만에 새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urbantree-babel_single channel HD video_2m 15s / 4m 12s_2015


urbanwave-falling_single channel UHD video_2m 20s / 4m 27s_2017


이번 전시에서도 산비탈을 올라가듯 끝없이 이어진 나선형 도로를 따라 위태롭게 상승해가는 모습을 통해 가지를 뻗어가는 또 한 그루의 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 'urbantree-babel'이나, 고층빌딩의 유리벽에 푸르게 난반사되는 일그러진 이미지에서 쉼 없이 밀려오는 검푸른 물결을 만나게 하는 'urbanwave-falling'과 같은 작품 속에서 그가 오랜 시간 전해왔던, 도시로 치환된 자연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작품이 전작들과는 조금 다른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집요할 정도로 이어지는 상승과 하강의 화면 전개를 통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도시의 존재론적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현재 이곳에는 없는 것, 무엇인지 모르지만 앞으로 도래할 것, 심지어 자연의 입장에서는 금지된 것, 욕망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지향하고 있다. 도시는 끝없이 이 욕망이라는 동력을 갱신해왔다. 그 누구도 도시의 욕망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고, 어디까지 나아갈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이것은 어쩌면 조금 다른 방식의 ‘무작위(無作爲)’라 볼 수 있겠다. 다만 도시는 트리나 폴러스(Trina Paulus)의 명저, 『꽃들에게 희망을』에 등장하는 거대한 애벌레 기둥처럼 서로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어내는 시선을 양분 삼아 비대해져 간다. 작가는 그러한 도시적 속성의 한 가운데 서서 마치 다른 차원에서 그 현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덤덤하게 무한증식의 도시를 그려나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작품이 일련의 ‘dream reading’ 시리즈로 이어진 것을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욕망이라는 통제 불능의 도시는 마치 꿈의 세계처럼 불가능한 것이 없다. 꿈이 무엇을 투영해내는 것인지는 늘 분명치 않지만, 작가는 실재하지 않는 현상의 경험마저도 어떠한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풍경으로 인지하고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해하려 한다. 작고 묵직한 빛덩어리들이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무수히 많은 별로 생성되고 있는 순간, 하늘에는 이미 여러 개의 달이 떠올라 있는 'dream reading-stars & moons'이나, 무언가를 끝없이 당겨내는 힘을 묵직한 움직임으로 포착하여 미지의 공간 마저도 지배하고 있는 강한 동력을 그린 'dream reading-gravity'와 같은 작품은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그 어떠한 공간 또한 공통적으로 거대한 욕망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dream reading-stars & moons_single channel UHD video_2m 45s / 5m 12s_2016


dream reading-gravity_single channel UHD video_2m 40s / 5m 12s_2015


'dream reading-passageway'는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무렵 마주하게 되었다는 꿈속의 장면을 담은 작품으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욕망이었을 힘에 의해 출구 없이 갇혀 무너져 내렸던 무수한 삶이 떠올라 심장 언저리를 묵직하게 누른다. 대체 용도를 알 수 없게 그저 끝없이 줄지어 서 있기만 한, 아직 상판을 얹지 못한 채 애초의 목표와는 무관하게 무한히 제 뿌리를 늘려가는 교각 구조물을 담은 'dream reading-piers' 또한 동일한 속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들은 근원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욕망이 우리가 속해 있는 모든 환경에서 이름 없는 삶 하나하나에까지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그것이 바로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삶을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dream reading-passageway_single channel HD video_4m 50s / 10m_2016


dream reading-piers_single channel UHD video_2m 56s / 5m 15s_2016


최근 작가의 관심은 현실의 도시와 비현실의 꿈을 넘어, 존재하고 있으나 그 실체를 가늠할 길 없는 우주로 공간적 상상력의 범주를 넓히고 있다. 'phenomenon-island woods'에서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보이는 위태로운 대지, 아니 섬에 가까운 땅 위로 바람에 온몸이 흔들리는 나무들이 휘청대고 있다. 탄생의 순간인지, 소멸의 순간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풍경 속에서, 흔들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살아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생명에게 완벽한 조건이었을 지구의 환경과는 사뭇 다른,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원소들로 이루어진 우주의 한 켠에서 꿈틀대는 새로운 생명을 마주하다 보면 그 삶의 모습이 너무도 위태로워서 과학자들이 왜 그토록 가능성이 높다는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phenomenon-island woods_single channel UHD video_2m 31s / 5m 8s_2016


그의 우주적 시선을 가장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은 바로 'phenomenon-fixed star'이다. 동서고금의 어느 곳에서 날아든 금빛 찬란한 동전들이 만들어내는 초신성의 이미지는 “자본주의라는 그럴듯한 외피를 쓴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의 욕망은 한계를 모르는 듯 가속화되고 있는데 별의 진화과정을 통해 그 역사의 흐름을 빗대어 상상해 본다”는 작가의 생각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욕망의 집합은 어느 순간 폭발하지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변주를 통해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서 다시 작동하게 된다. 대폭발 이후에도 아련하게 빛나는 금환(金環)에서 최근 온 인류의 일상을 뒤바꾼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떠올리는 건 억지스러운 일일까. 그 또한 누군가에 의해 어딘가에서 저들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 증식되어온 욕망의 산물일 터이니 말이다.


phenomenon-fixed star_single channel UHD video_2m 55s / 5m 16s_2019


흥미로운 것은 삶의 조건이 다른 외계 어딘가의 가장 초기 형태의 생명체를 작가는 또다시 나무의 형상으로 불러왔다는 점이다. 스스로 물리적 동력이 없는 생명체는 어떻게 삶을 잉태했을까. 그 위태로운 나무들은 의미론적인 대척점을 가진 채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나무와 존재의 맥락을 함께한다. 드높은 의지로 굳건하던 김정희의 나무와 한 치의 삶도 가늠하기 어려운 이종석의 나무는 서로 모습은 다르지만 거대한 현실에 맞서 있는 의연한 존재의 ‘사의(寫意)’로서, 우리에게 동일한 말을 건넨다. 또한 도시에서 꿈으로, 꿈에서 우주로 장소를 옮겨오는 동안에도 이종석이 그려내는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처럼 변함없이 아름답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역설이다. 어쩌면 그의 작품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광폭함, 세상사의 기쁨과 비극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던 그 옛 문인들의 그림처럼 도구와 형식이 달라져도 시대를 넘어 여전히 유효한 그림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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